남겨진 감동

버리고 갈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/ 박경리

DimondBack 2011. 8. 24. 06:17

 

 

옛날의 그 집

 

빗자루병에 걸린 대추나무 수십 그루가

어느 날 일시에 죽어 자빠진 그 집

 

빈 창고같이 휭덩그레한 큰 집에

밤이 오면 소쩍새와 쑥꾹새가 울었고

연못의 맹꽁이는 목이 터져라 소리 지르던

이른 봄

그 집에서 나는 혼자 살았다

 

다행히 뜰은 넓어서

배추 심고 고추 심고 상추 심고 파 심고

고양이들과 함께

정붙이고 살았다

 

달빛이 스며디는 차거운 밤에는

이 세상 끝의 끝으로 온 것 같이

무섭기도 했지만

책상 하나 원고지, 펜 하나가

나를 지탱해 주었고

사마천을 생각하며 살았다

 

그 세월, 옛날의 그 집

나를 지켜 주는 것은

오로지 적막뿐이였다

그랬지 그랬었지

대문 밖에서는

짐승들이 으르렁거렸다

늑대도 있었고 여우도 있었고

까치독사 하이에나도 있었지

 

모진 세월 가고

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

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

 

*박 경리 유고시집 "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" 중에서

 

 

 

 

 

 

 

  


'남겨진 감동' 카테고리의 다른 글

그사람  (0) 2011.08.26
사라진 뒤에야 빛이 나는 "행복"  (0) 2011.08.24
그땐 그 "길"이 왜 그리 좁았던고 ..  (0) 2011.08.21
"사랑"이라는 선물  (0) 2011.08.20
가끔은 마음도 쉬고 싶다  (0) 2011.08.16