마음을 읽으며

연필깎기 / 도종환

DimondBack 2010. 8. 11. 12:58

      연필깎기 연필을 깎는다. 고요 속에서 사각사각 아침 시간이 깎여 나간다. 미미한 향나무 냄새 이 냄새로 시의 첫줄을 쓰고자 했다. 삼십 년을 연필로 시를 썼다. 그러나 지나온 내 생에 향나무 냄새나는 날 많지 않았다. 아침에 한 다짐을 오후까지 지키지 못하는 날이 많았다. 문을 나설 때 단정하게 가다듬은 지조의 옷도 돌아올땐 매무새가 흐트러져 있었다. 연필을 깎는다. 끝이 닳아 뭉툭해진 신념의 심을 천천히 아주 천천히 깎는다 지키지 못할 말들을 많이 했다. 중언부언한 슬픔 실제보다 더 포장된 외로움 엄살이 많았다. 연필을 깎는다. 정직하지 못하였다는 걸 안다. 내가 내 삶을 신뢰하지 못하면서 내 마음을 믿어달라고 하였다. 그래서 바람이 그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. 모순어법에서 벗어나지 못한 내 시각 얇게 깎여져 나간 시선의 껍질들을 바라보며 연필을 깎는다. 기도가 되지 않는 날은 연필을 깎는다. 가지런한 몇 개의 연필 앞에서 아주 고요해진 한 순간을 만나고자 연필 깎는 소리만이 가득 찬 공간 안에서 제 뼈를 깎는 소리와 같이 있고자 ...